▪︎종묘-인사동 <집창촌>

■ 종묘. 창덕궁. 인사동.--집창촌.

천 만 도시 안에, 산이 있고, 강이
있는 도시가 한양이다. 육신을 모신묘가 왕릉이라면 영혼을 위한 묘가 종묘다. 
산자와 죽은자가 만나서 위로 받고
그리워 하는 공간. 왕들의 영혼이
깃든 곳이 종묘다. 27명의 왕이 전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본다.

한국인은 별로 관심이 없는데 외국인이 감탄하는 곳이 창덕궁. 종묘다. 창덕궁은 인공적으로 조성한게 아니라 그냥 야산이였던 산비탈 계곡을 따라 궁과 정자를 배치했다. 정자가 17개 남아 있다.
최고의 격식과 검소함을 건축공간
으로 구현했다.

유네스코는 인류 전체를 위해
보호해야 할 정도로 뛰어난 유산을
'세계유산'으로 지정하고 있다.
종묘와 창덕궁이 등재 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문화유산이다.
단순함이 얼마나 고귀한지 종묘는
몸으로 보여준다. 군더더기 없는
고귀함. 조용한 가운데 일어나는 위대함이 있다.
이렇게 장엄한 공간은 세계 어디 에서도 찿아 보기 어렵다.
한 나라를 운영할려면, 이데올로기가 있어야 한다. 이데올로기 역할을 한 건 종교였다. 서양이 기독교라면 동양은 불교었다. 조선이 건국되고, 유교국가 조선에 맞는 종교시설이 종묘라고 보면 된다.
개국초기 경복궁을 짓기 전에 먼저
종묘와 사직부터 세웠다.
종묘는 왕과 왕비등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국가 사당이다.
종묘제례는 조상님께 감사의 뜻으로 올리는 의식이라 음악과 무용으로 '팔일무'를 춘다.

참고로 사대부는 4대 조상까지 기일 날에 제사를 지낸다. 그 윗대 조상들은1년에 하루 날을 정해 한꺼번에제사를 지내는데 그걸 '시제'라고 한다.
하지만, 유교 국가인 조선 왕실은
500년 넘는 동안 모든 왕과 왕비의
제사를 모셨다.
왕들의 조상님들을 모시는 장소라 신성시했고 화재를 대비해 종묘 주변을 빈 공터로 조성했다.
한국에서 가장 긴 목조건물이다.
신실이 19칸이고 길이가 100m
가 넘는다.
기둥과 기둥 사이가 19개다.
신주를 모신 신실이 19분이다.
'정전'에 왕 19분을 모셨고, 영녕전에 16실에는 왕16.왕비18분의 신주를 모셨다.
'공신당' 은 역대왕을 도운 공신들의 신주를 모셨다.
월대 천,500평 박석 위 양옆으로
회랑도 없이 담장이 낮게 내려 앉아있다. 건축으로 이렇게 고요하고
경건한 공간을 만든 건 기적이다.
음악.춤. 건축. 유교라고 하는 정신이 어우러있는 곳이 종묘다.
<종묘>

경복궁도 종묘도 1592년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버렸다. 
전쟁이 끝난 뒤 종묘는 다시 지어졌지만 경복궁은 260년 간 폐허로 방치했다.
종묘 박석위에서 음악과 춤이 펼쳐지며
각 왕의 신주에 제사를 올린다.
제사의식에 사용되는 음악
과 춤까지 500년 이상 보존된 것이
역사적 가치로 인정받아 세계유산
으로 지정됐다.
그런데 종묘라는 신성한 공간 주변에 집창촌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종로3가. 4가 일대와 세운상가 자리에 집창촌이 빼곡히 들어 찼다.
생겨 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종묘 앞이 공터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전후로
화재 예방으로 공터를 넓게 형성됐던 이 곳에 정부의 통제력이 없던 혼란기를 틈타 공터에 판잣집이 생기고 성매매업소들이 무질서하게 들어서면서 집창촌이 형성됐다.

부산에도 부산역이 중앙동에 있을때 택사스거리가 생기고 주변으로 집창촌이 생겼었다. 해운대 백사장 뒤에도 미군부대 이름을를 딴 집창촌이 있었던 것과 같다. 
하얄리아부대. 완월동. 초량일대
영도 조선공사 거리에도 있었다.

전쟁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피난민과 북한에서 넘어온 월남인들이 서울로 대거 유입됐다.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전쟁 미망인들이 생계를 유지 할 수단이 전무 했다. 극심한 빈곤 속에서 마지막으로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수단이 성매매였다. 전쟁 이후 급증한 빈민과 여성 실업 문제를
정부가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명동성당>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1960년대 초까지 종묘 앞은 판자촌과 '종삼'같은 윤락촌으로 가득했다.
외람스럽게도 한국전쟁 이후 20년 동안 종묘 앞에는 '종삼'이라는 이름의 세계 최대 규모의 집창촌이 기생하고 있었다. 집창촌을 '종삼'이라 불렸다. 종로3가,4가 일대 전체가 집창촌이였기때문이다

행정구역상 종로3가에 걸쳐있어
'종3'으로 불리다가 '종삼'으로 굳어
졌다. 한국전쟁 직후부터 1968년
까지, 서울의 대표적이고 거대한
집창촌이었다.
1968년 그때로 되돌아가 보자.
종묘 앞에서 대한극장에 이르는
너비 50m, 길이가 1km에 무려
만 오천평의 공지에 2,200여동의
무허가 판잣집과 집창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세운상가가 들어선 바로 그 자리다.
<천상병--목순옥>

1968년 '종삼' 소탕 '나비작전'이 펼쳐졌을 때 '종삼'의 범위가 종로3가와 4가, 단성사 뒷골목.
종묘 앞 일대를 중심으로 낙원동. 봉익동. 훈정동.와룡동. 묘동. 권농동. 원남동은 물론이고 길 건너 남쪽의 관수동.장사동. 예지동까지 암세포처럼 펴져 있었다. 
너무 광범위했지만 서울시장
김현옥은 군사작전하 듯 해치웠다.
나비작전은 1968.9.27시작되어
단 9일 만인 10.5일 종결됐다.

종삼 골목마다 밝은 백열등을 
대낮처럼 수도 없이 달아 손님을
식별했다. 사복경찰. 시,구청 공무원들이 입구에서 직업과
집 전화번호를 물었다.
출입자 명단을 공개하겠다고 서울시장이 발표했다.  손님이 끊겼다.
서울시가 현재의 낙원상가부터
종로5가까지 조사해 보니 
250여 업소가 존재했다.
윤락여성이 1368명. 포주11명. 바람잡이 170명에 이르렀다.
전국 최대규모의 거대한 집창촌
이였다. 쏫타임. 롱타임. 스페설로
금액도 달랐다. 산업화시대 우리는 이렇게 살았다.
낙원동 한옥지구(고급) 종묘 앞 무허가 건물 지대(하급) 종묘 건너편 소개도로 터 (최하급) 등 3등급으로 분류됐다.

이 지역을 현장 답사하던 김현옥
서울시장과 중구청장 일행에게 윤락여성이 유객 행위를 했다는 신문 기사도 있다.
종묘 주변지역. 특히 '종삼'이 해체된
이후 종로와 퇴계로 사이에 길게
늘어선 지역을 정비하기 위해 박정희. 김현옥이 주도한 도시 재개발 계획의 상징물로 '세운상가'
건축물이 들어선다.
'세운'이란 이름은 '세상의 기운이
이 곳으로 모이라'는 뜻이다.
지금 세운상가 4구역이 빈터로 남아
있다. 개발논리로 야단법석이다.
서울의 랜드마크는 남산 조망이다.
최소한 4대문 안에서 남산 조망은
보존해야 한다. 창경궁에서 보는
남산 조망은 기가 막힌다.

종로3가, 4가를 가로 지르며 
세운상가. 현대상가. 청계상가. 
삼풍상가. 대림상가등 으로 연결
되는 거대한 건축군이 형성됐다.

나비작전은 종묘 앞이라는 상징적
공간의 정화에는 성공했지만,
성매매라는 사회 경제적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 했다.
거대한 홍등가는 여러 개의 작은
홍등가 형태로 서울 전역에 분산
되어 퍼지는 결과를 낳았다.
우리는 이런 시대를 격으며 산업화
근대화를 일구었다.

청량리 588은 완전히 사라졌다.
초고층 주상복합 건물 롯데캐슬이
들어선 대규모 주거. 상업단지로
변모했다. 천호동 택사스도 사라
졌는데, 미아리 택사스는 지금도
철거 진행 중이다.
재개발로 거의 사라졌지만 성매매
자체는 다른 형태로 음지화 되었다. 오피스텔. 원룸. 인터넷을 통한 채팅 앱. 출장 마사지등 개별화된 형태로 숨어들어 단속 자체가 어려워 지고 있다

'종삼'에서 밀려난 성매매 여성들은
미아리 택사스. 청량리 588등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새로운 집창촌을
형성했다. 성북구 하월곡동 일대가 미아리텍사스촌이다. 장기간 서울의 주요 성매매 집결지로 급성장했다.  청량리 588은 '종삼'보다 먼저 형성된 집창촌이었으나 종삼 해체 후 인력이 추가로 유입되면서 최대 규모 집창촌으로 번성했다. 

6.25전쟁 당시 경춘선 종점으로 군인들을 상대로 성장 발전했다.
여성들이 떠난 빈자리는 가난한 이들이 찿는 돈의문 쪽방촌으로 채워졌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종로3가역. 4번 출구 뒷골목에 위치해 있다.
돈의동 쪽방촌은 400가구 인데
대부분 1인 가구이다. 주로 일용직
노동자. 기초생활수급자. 취약계층
이 거주하고 있다.
요약하면 종묘 앞 '종삼'이 해체된
자리에 세운상가가 들어서고 그와
함께 빈민주거 형태의 돈의동 쪽방
촌이 형성됐다.

6.3 선거를 앞두고 종묘가 소환되고 있다. 개발을 할 것이냐?
보존 할 것이가?

인사동은 반드시 답사코스
에 넣는다. 한글과 기독교와 백정을 만날 수 있기때문이다.
인사동길 7-1에는 승동교회가 있다. 벽돌 건물은 1910년착공,1912년에 준공돼 서울시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있지만 이 곳이 천민 백정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신분차별 철폐운동을 했던  산실이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구한말에 들어와 얼마나 통쾌한 일을 했는지, 그 통쾌함이 얼마나 혁명적인 작업을 했는지 알게 해주는 일화들을 만나게 된다.

대하소설 '임꺾정'의 앞부분은 갓바치로 시작된다.
승동교회 근처에 백정들이 모여
살았다. 구한말에는 백정도 4등급
이 있었다. 갓바치가 가장 밑바닥
이었다. 백정이 소를 도살하는 역할이 맨 위 등급이고 해체하는
역할이 그 다음이고, 그리고 배분이 있고 마지막에 갖바치가 있었다.

갓바치는 양반 집에 들어갈 때도
대문으로 못 가고 대문 옆의 조그만 개구멍 같은 데로 기어 들어가서 신발 크기를 쟀다. 최하층 천민이던 이 갓바치들에게 한글 성경을 가르친 교회가 승동교회다.
소가죽을 벗겨 가죽 신발을 만드는
천민 중에 박성춘이 승동교회의
장로를 했고, 박성춘의 아들이 세브란스 의전 1회 졸업생 7명 가운데 한 명이다.

한글은 광화문 광장에 앉아 계신 세종대왕이 창제했지만 창고에
처박혀 있었다. 먼지를 털고 다시
꺼내 '한글 성경"(1882)으로 하층민에게 가르친 주체는 개신교였다.

그 '승동교회'가 인사동에 있다.
원래는 여기에 승려들이 살아서 '승동' 이라고 했다. 그 주변에 백정들이 모여 살았다.
천상병과 목순옥이 운영하던
 '귀천' 도 인사동에 있다. 
직선이 아닌 곡선길 따라 걸으면 이야기가 출렁출렁한다.
땅이 시키는데로 건물을 배치했다
는 창덕궁은 언덕 넘어에 후원이 있다. 인공적으로 조성한 것이 아니라 산비탈에 계곡을 따라 정자를 배치했다. 
대표적인 것이 부용정. 애련정. 존덕정이 있고 그 안쪽으로 들어
가면 옥류천계곡이다.
그 전체가 정원이 됐다. 이런 스케일은 우리나라 밖에 없다. 삶의 절정은 언제나 흔적을 남긴다.

종묘와 집창촌. 창덕궁을 따라 꼬불 꼬불, 올망 졸망. 인사동길에서 조선왕조 500년역사와 근,현대사의 아픈 흔적을 만났다. 
 '길 위의 인문학'은 생각의 근육 키우기다.

                  기행작가    권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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