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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하회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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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에는 도산서원, 병산서원 봉정사, 퇴계와 이육사가 있지만, 하회마을은 경주의 양동마을과 함께 한국의 역사마을 이라는 명칭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마을입니다.  실제로 주민들이 거주하며 전통을 이어가는 '살아 있는 유산' 입니다. <북촌댁 대청마루> 인문학적 깊이가 있는 답사지로 하회마을 중심부에 있는 화경당(북촌댁)을 찿았습니다.  단순한 관람을 넘어 조선시대 양반가의 생활문화를 직접 경험해 볼 수 있는 교과서 같은 곳입니다. <하회마을> 종가와 서원이 잘 보존되어 있어 성리학적 전통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마을 한 가운데 풍산류씨 북촌댁은 묘한 기운이 흐르더군요. 전형적인 양반가옥의 구조인 대문채,안채, 사랑채,사당이 배치되어 있는데 사랑채가 '화경당'입니다. <화경당> 낙동강이 마을을 감싸고 흐르는 독특한 자리에 터를 잡아 많은 전란도 피해 갔다는 마을입니다. 서애 류성룡의 종택인 충효당과 아버지와 형이 살던 대종택 양진당은 길 하나 사이로 이웃을 하고 있는데 마을길을 경계로 남촌, 북촌이라 불렸습니다. 임진왜란도, 병자호란도, 6,25도 비껴간 마을에는 옛 선조들이 살았던 고택이 고스란히 남아 전통의 맥을 이으며 후손들이 살고있습니다. 북촌댁에서 조선의 한복판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사대부가에서 보기 드문 2층구조에 한옥호텔 어디에도 없는 72칸 북촌댁은 할아버지가 거주하는 큰사랑채와 아버지와 손자가 거주하는 작은 사랑채가 따로 있습니다. 안채와 연결된 쪽문은 숙박을 하지 않으면 볼 수 없습니다.  한옥하면 군불이 먼저 떠오릅니다 어릴적 사랑채에서 생활하던 머슴 에게 나는 한글을 배웠습니다. 하회마을에서 유일하게 군불때는 집...

심양고궁---병자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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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양고궁-'노예시장' 청나라는 어디에서 누가 건국 했을까?  변방의 작은 부족인 여진족이 어떻게 청을 건국할 수 있었을까? 관심을 가져야할 이유는 많지만 병자호란과 조선인 노예시장을 보며 외교의 중요성을 생각해본다. 명나라와 조선은 같은 시기에 개국 했다. 임진왜란으로 조선은 구할 수 있었지만 명나라는 급속히 쇠퇴했다. 환관정치가 극에 달했다. 몽골이 만리장성을 수시로 넘어 오는데도 만력제는 3천 궁녀와 2만 명의 환관을 두고 국고를 탕진 하는 군주였다. 황제가 48년 재위 했는데 재상을 독대한 건 한 번뿐이라는 기록도 있다.  사실이다.  환관들이 국정을 농단할때 만주에서 누루하치가 부상한다. 여진족이다. 백두산 근처에 살던 누루하치는 산삼을 캐서 명나라와 교역했다. 그러면서 조선을 수시로 침범해 왔다.  압록강 건너에는 건주여진, 해서여진, 야인여진이 있었다. 명나라는 만리장성 밖에 있던 이런 여진족을 점령하지 못했다. 인삼교역을 해주며 만주를 관리할 뿐이었다. 여진족 누루하치는 결혼으로 혼인 관계를 맺으며  세력을 넓혀 나갔다. '선조실록'에 팔기군 군사조직이 기록 돼 있다. 임진왜란때 선조가 건주여진에 사신을 보냈다. 여진의 움직임이 너무 이상해 신충일을 압록강 건너  누루하치를 여러차례 만나게 했다. 팔기군이라는 군사제도와 정치체제가 운영하고 있었다. 만주족 팔기군은 사냥해 먹고 살던 부족을 군사조직으로 만든 것이다. 농사도 짓지 않고 세금도 내지 않고 오직 국방 임무만 하도록 했다. 누루하치는 국호를 금나라의 후예 라는 뜻으로 '후금'이라 명했다. 후금이 심양을 점령하고 요동반도 전체를 장악한다. 랴오닝성 심양시에 여진족이 후금을세웠다. 심양고궁에서 누루하치가 통치를 시작했다. 1626년 누루하치의 팔기군이 영원성에서 최초로 패하고 7개월 후 누루하치는 사망한다. 8번째 아들 '홍타이지...

보수동 책방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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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배로운 물이 흐르는' 곳이라 보수동이란 지명이 생겼지만 보배 로운 책들로 가득찬 동내가 보수동입니다. 오랜 세월, 역사가 축적된 보수동 책방 골목에 <양서협동조합>과 <부산 중부교회>라는 고급 문화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함석헌 ▪︎전환시대의 논리-리영희 ▪︎노동의 새벽(시집)-박노해 ▪︎역사란 무엇인가? 이런 책을 읽고 독서토론을 했다 고, 독서모임 대학생들과 노동자들을 북한을 찬양하는 자생적 공산주의로 몰아 감옥을 갔던 시절입니다.<'변호인'---영화> 중부교회는 1970~80년대 부산지역 민주화운동의 집결지 역할을 하던 곳이었습니다. 유신독재와 맞서 싸우던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이며 부산 시민들의 정신적 안식처가 된 곳으로 부산의 명동성당이라고 불렸지요. 중부교회는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문익환 목사가 단골로 시국 강연을 했던 곳입니다. 문익환.안병무.한완상.김동길.김광일. 그 아래 노무현. 문재인이 있고 고은도 있었습니다. 1987년 6,29선언이 나오고, 7월 이한열 열사가 숨을 거듭니다. 그는 민주화 운동가로는 처음으로 망월동 5,18묘역에 잠들어 있습니다. 영결식장에서 어머니가 쏟아낸 첫 마디는 참척의 고통이었습니다. 하루에 30만 발의 최류탄과 지랄탄을 쏘아대고, 백골단이라는 말이 신문을 도배하던 때였습니다. 서울대생 박종철이 누구인지도 몰랐던 때에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치안본부장의 말에 온 국민들이 분노했습니다. 21살 청년 박종철의 죽음은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 놓았습니다. 1987.1.15. 박종철은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에서 심한 물 고문으로 질식사합니다. 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이부영 의원, 용산병원 내과의사 오연상, 한재동 교도관이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