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양고궁---병자호란

■ 심양고궁-'노예시장'

청나라는 어디에서 누가 건국 했을까?  변방의 작은 부족인 여진족이 어떻게 청을 건국할 수 있었을까?
관심을 가져야할 이유는 많지만
병자호란과 조선인 노예시장을
보며 외교의 중요성을 생각해본다.

명나라와 조선은 같은 시기에 개국
했다. 임진왜란으로 조선은 구할 수 있었지만 명나라는 급속히 쇠퇴했다. 환관정치가 극에 달했다.
몽골이 만리장성을 수시로
넘어 오는데도 만력제는 3천 궁녀와 2만 명의 환관을 두고 국고를 탕진 하는 군주였다. 황제가 48년 재위 했는데 재상을 독대한 건 한 번뿐이라는 기록도 있다.  사실이다. 

환관들이 국정을 농단할때 만주에서 누루하치가 부상한다. 여진족이다.
백두산 근처에 살던 누루하치는
산삼을 캐서 명나라와 교역했다. 그러면서 조선을 수시로 침범해 왔다.  압록강 건너에는 건주여진,
해서여진, 야인여진이 있었다.
명나라는 만리장성 밖에 있던 이런
여진족을 점령하지 못했다.
인삼교역을 해주며 만주를 관리할
뿐이었다. 여진족 누루하치는 결혼으로 혼인 관계를 맺으며 
세력을 넓혀 나갔다.
'선조실록'에 팔기군 군사조직이 기록 돼 있다.

임진왜란때 선조가 건주여진에 사신을 보냈다. 여진의 움직임이 너무 이상해 신충일을 압록강 건너 
누루하치를 여러차례 만나게 했다.
팔기군이라는 군사제도와
정치체제가 운영하고 있었다.
만주족 팔기군은 사냥해 먹고 살던
부족을 군사조직으로 만든 것이다.
농사도 짓지 않고 세금도 내지 않고 오직 국방 임무만 하도록 했다.
누루하치는 국호를 금나라의 후예
라는 뜻으로 '후금'이라 명했다.
후금이 심양을 점령하고 요동반도
전체를 장악한다.
랴오닝성 심양시에 여진족이 후금을세웠다. 심양고궁에서 누루하치가 통치를 시작했다.
1626년 누루하치의 팔기군이 영원성에서 최초로 패하고 7개월 후 누루하치는 사망한다.
8번째 아들 '홍타이지'가 즉위 한다. 그가 제2대 황제다.

여진족만으로는 부족하자 몽골족,
한족,조선족까지 결혼으로 통합하고 흡수한 후 하나로 묶어낸 것이 만주국이다. 여진이라 부르지 말고 만주라 부르게 했다. 
만주는 만들어 낸 공동체다. 
다민족 국가로 시작했다. 
<후금의 정전>

정묘호란때는 여진족이 50만도 않됐다. 군대 동원 인력이 겨우
5만 정도었다.누루하치는 심마니를 10만 명 두고 명나라와 교역하며 은화를 확보하기 시작한다.
명나라가 도자기,비단으로 은화를
모으면 이 은의 1/3이 인삼 값으로
여진족에게 넘어갔다.

경제력을 바탕으로 최신 대포를 만들고 신식군대를 양성하면서
강력한 나라를 만들어 나갔다.
다양한 문명, 다양한 민족을 흡수
하여 다민족국가를 만들고 상업
으로 경제적 기반을 쌓아 청나라를
건설하게 된다. 도르곤이
산해관을 넘어 베이징을 정복하는
역사의 출발지가 심양이다.
건주여진의 부족장이었던
홍타이지가 대청으로 이름을 바꾸고 칸의 칭호까지 받았지만 대륙 진출을 못하고 1643년 사망한다.
홍타이지--2대 황제

청태종 홍타이지는 명나라를 치기 전에 후방인 조선부터 정복한다.
인조가 '숭명반청' 정책을 이어가고 있으니 대륙을 정복하기 전에 후방
부터 평정하자. 그것이 1637년 병자호란이다.  1개월 만에 전쟁을
끝내고 전리품으로 50만 명의
조선인 포로를 끌고 심양으로 왔다.
소현세자가 7년간 머물렀던 조선관
근처에 조선인 노예시장이 있다.
남성은 팔기군으로 여성은 첩으로
팔려 나갔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효종)의
아버지가 인조다.  

정조시대에 심양을 답사하고 쓴 기행문이 '열하일기'다.
소현세자의 흔적을 통해 조선의
현실을 비판하고 선진문물을 받아
들여야 한다고 썼던 연암 박지원은
반성문을 쓰고 살아 남았지만
'열하일기'는 조선시대 금서였다.
압록강을 건너 심양을 거치고
북경에서 열하까지 여행을 했는데
심양에서 역사를 회고하는 글을
썼다고 금서가 됐다.

누루하치의 14번째 아들 도르곤이
산해관을 넘어 대륙을 정복한다.
홍타이지의 이복동생이다.
만주족들이 청나라를 세워 북경에
도읍을 정한 뒤에도 심양은 제2수도로 융성했다.  
누루하치와 홍타이지의 무덤은 심양에 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조선왕조는 명나라에 사대외교를
해 왔다.
이를 통해 상당한 재정부담과 주권
의 제약을 감수하는 대신 무역충돌
을 피하고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군사비 부담을
줄이고 다른 북방민족이나 일본으로 부터 안보를 보장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다, 만주족 청나라가 일어나
명나라를 위협하면서 형제관계를
요구하며 정묘호란을 일으컸고
나중에는 명나라와 사대관계를 청산하라고 요구하며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결국 조선국왕이 청나라에 항복하면서 오랑케라고 여겼던 청나라에 사대외교를 해야했다.

사대외교는 생존외교이며 국익외교라 할 수 있다.  미국에 대해서도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일종의 사대외교를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모든것을 미국의 기준으로 바라보려 하는 경향을 보이는 세력들도 많다.
거란이 세운 요나라, 몽골이 세운
원나라,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요구하는 외교를 받아들이지
않고 버티다가 침략을 당했던 역사가 있지만, 중국의 일부였던 적은 없다.
지금도 한반도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들로 둘러 싸여있다.
이러한 조건에서도 경제적 번영을
이룩하고 있다.

경제적 번영을 다지기 위해서는
어떤 외교전을 펼쳐야 할까?
이재명대통령과 시진핑주석이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국빈만찬
후 선물받은 스마트폰으로 셀카를
찍으며 치밀한 외교전을 펼친다.
 
                                    권영주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 기행작가와 함께하는 금산.영동 문학기행.

도시농부의 깨알 인문학

방탄소년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