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항문학의 현장을가다
'위항문학'의 현장을 걷다.
조선 선조때부터 싹트기 시작한
서울 서촌 중심으로 중인,서얼,
서리 출신의 하급관리와 평민들
에 의해 이루어진 문학양식이다
양반 사대부가 아닌 중인 이하
하급 계층을 '위항인'이라 했다.
이들의 목적은
첫째가 시사조직이고 둘째가
공동시집 발간이였다.
그 이유가 뭘까?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청계천
의 윗동내라는 뜻의 이름을 가
지고 있는 '북촌 한옥마을'이 도심 속 박물관처럼 있다.
반면,
인왕산과 경복궁사이에는 왕족
과 사대부. 중인들이 모여 살던
'서촌마을'이 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참 오래된 동네다.
오래된 동네에선 아름다운 향기
가 짙게 묻어 난다.
누군가에게 꿈이요, 누군가에겐
희망이였을 삶들을 보며 이들이 주는 언어의 행간읽기를
한다.
서촌은 나에게 진경산수화 같은
동네이다
인왕산 서쪽 아래마을에 이런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무슨일은 하며 살았을까?
역관, 중인, 서얼, 서리출신의
하급관리와 평민들이 문학을
통해 신분상승 운동을 펼치는데
당시 양반사대부가 아닌 계층인
중인 이하 하급계층을 '위항인' 이라고 지칭했고 편의상 위항문
학, 여항문학, 중인문학이라고
지칭 하게 된 것이다.
이들의 목적은 양반사대부처럼
"시사"조직과 "공동시집" 발간
이였다.
시사들은 오로지 위항문학 운동
을 통한 신분상승을 꾀했다.
정조 때 평민 시인 천수경이 그의 집 "송석원'에서 '시' 동인들의 모임 아지트를 만들어
신분상승 운동을 활발히 했다.
유난히 아름다워 마음 아픈 서촌 동네 길을 걷는다.
이후 공동시집이 더 이상 나오
지 않는 이유는 서얼들의 신분
상승 운동이 필요가 없었고
구태어 자신들의 배경을 들추어
내기를 꺼렸기 때문이다.
한 번도 정권의 중심부에 있어
본 적이 없는 삶을 살았다.
행간 속에 숨어있는 시어들이 참 아프다.
전문지식인과 기술직 중인, 역
관. 서얼, 승려, 하층민까지 참여한 위항문학은 주로 한시
를 가리키지만 양반 사대부의
전유물인 시조와는 다른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 냈다.
땅의 기억이 넘실거리는 옥인동
골목길에 위항문학의 글과 그림을 내걸어 이 곳이 한국문학에서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낸 위항문학의 발상지
임을 드러내고 있다.
조선은 성리학자가 지배한
나라였고 한시와 시조는 상류계
층만이 누릴 수 이는 귀족문학
이였다.
그들 지배층들이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문학장르다.
따라서 '시집'과 '시사' 라는 그들 만의 조직을 만들였다.
그런데,
경복궁 서쪽 인왕산 아래 살던
중인들이 모여 중인문화를 꽃피
우며 문학을 통해 신분 상승
운동을 했으니 그 것을 "위항문
학"이라 한다.
수성동계곡 아래 이상의 집과
제비다방이 있다.
중인들이 모여살던 동내에서
자랐던 이상은
제국주의 권력의 상징인 조선총
독부를 다니다 과감히 때려치우
고 제비다방을 열고 새로운 문학을 탐색하던 시인 이였다.
조선 중앙일보에 연작시 '오감도'를
연제하다가 독자들의 비난으로
연재를 중단 한다.
'오감도는 영도다리가 개통되던
그 해 신문에 연재된다.
시인 이상은 '동백꽃"의 저자 김유정을 찿아가 동반 자살을
권유하지만 기생 박녹주에 빠
져있던 유정이 거절하자 일본
으로 건너가 27세로 사망.
이상이 백부집 양자로 들어가
살던 집이다.
그의 삶과 사유는 집 앞 대문으
로 흘러가던 물길과 같다.
이상이 도쿄제국대학 부속병원
에서 세상을 떠나가 하루 전
서울에서는 아버지와 할머니가
같은 날 세상을 떠났다.
1937년 4월 17일이다.
부인 변동림이 화장한 유해를 가지고 돌아와 한 달 전 작고한 '동백꽃'의저자 김유정과 '날개'의저자 이상의 합동 추도 식이 경성 부민관에서 열렸다.
이중섭은 일본에서 공부했으나 외래의 화풍에 매몰되지 않았던 그의 그림보다 일제와 6,25를
관통한 그의 삶이 더 애잔하다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은
형 수양대군에 맞서 조카 단종
을 위해 신의를 지킨 왕자이다.
그가 수성동계곡에 별장짓고
시와 그림을 즐겼다.
인왕산 기슭 수성동 계곡 골짜기는 겸재 정선의 그림에
많이 등장할 만큼 아름다운 곳
이다.
몰락한 양반출신이었던 겸재는
창와대 궁정동 인근에 모여 살던 장동 김씨의 후원을 받으
면서 자신이 살던 인왕산 주변
의 화려한 경관을 독특한 필치
로 그려 넣었다.
진경은 겸재 정선이다.
겸재는 평생 세 번 이상 금강산
을 다녀온 이후 금강산 일대의
풍경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그렸다. 당시 산수화가 주로
중국 산수화를 보고 그린 반면
겸재는 이랬다.
그의 화풍이 자랑스런 이유다.
박정희 무인세력들이 1971년 계곡 좌우로 옥인시범아파트 9개동을 짓고 근대화의 상징으로 자랑했다.
풍경이 사라진 이 흉물을 헐어
내는데 40년이 걸렸다.
이 하숙집에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없기를~~'로 시작
하는 '서시'가 탄생했다.
24살 무명의 청년이 쓴 시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있다
'시'는 느끼는데로, 쓴 인간의 삶
이다. 윤동주의 삶과 언어는
하나였다.
동주의 위대함을 볼 수 있다!
1941년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아래 뿌리고
싶다'며 '십자가'를 쓸때 이광수
는 창씨개명을 하고 10일 후
신문에 이런 글을 쓴다.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 이다!'
시인 이상을 좋아했던 동주의
하숙집이 수성동계곡 아래쪽에
있다. 청계천 발원지가 이곳이다.
수성동 계곡에 안평대군 집이있고 그의 꿈을 그린
안견의 '몽유도원도의 탄생지가
되는 곳이다.
이름도 없던 용정 유학생 동주
의 생각이 짙게 묻어 있는 집
이다. 계곡물이 흐르던 대문 앞
은 복개돼 깔끔하다.
인왕산 자락에 문학관은 뜬금 없다. 윤동주가 살아 생전 한
번도 못왔다는 산 속에?
겸재 정선은 청운동에서 태어나
옥인동에서 생을 마감했다. 84세 까지 인왕산 자락에서 살았다.
신이 주신 가장 큰 책은 자연
뿐이지 싶다.
날마다 새롭고 교훈을 준다.
서울대, 이화여대교수로 평생
살며 이 곳에서 새로운 화풍을 열었다.
먹과 선. 그리고 공간에
대한 여백이 가장 동양적일때
이것을 버리고 새로운 기법의 동양화를 시작하여 강렬한 색감으로 전통속에 독자적인
신화풍을 구축하며 자신만의
현대적 미감을 구현해 냈다.
2013.2.25 귀천했다.
박노수 가옥 화장실과 욕실
강렬한 색감으로 신화풍을
열었다.
1930년대 대표적인 친일파였던 윤덕영이 딸을 위해
지었던 집이다.
일본식 건물에 전통적 온돌을
채택하여 문화재 자료 제1호다
박노수가 구입해 작업실로 사용
가을볕이 간질 간질 합니다.
볕을 등지고 서촌 문학탐방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데
햇살이 더 놀다 가라 자꾸 허리
춤을 붙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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