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와 부산항1부두

윤동주를 모르는 국민이 있을까?
그의 '서시'는 전국민이 알고 있는
대표작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윤동주를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한 시인의 글이 교과서에 실리면서  윤동주의 '시' 편들이 일본열도를 적시기 시작했다.

일본 지쿠마쇼보 출판사가 발행하는 일본 국정교과서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란 제목으로 동주의 시 4편이 수록됐고 학생들은 윤동주의 이야기를 들으며 성장했다
이 아이들에 의해
"윤동주를 사랑하는 모임"이 생겨났다. 회원들은 한글를 배우기 시작했고 동주의 시를 읽기 시작했다. 이름도 없던 식민지 청년 윤동주가 시인으로 부활했다.

교과서에 윤동주의 시를 실을 수
있도록 한 분은 전 후 일본을 대표하는 여류시인 '노리코'였다
1986년 출판된 '이바리기 노리코'의 수필집 [한글에의 여행]에 <비운의 청년 시인 윤동주>란 제목으로 동주의 대표 시 4편을 소개했는데, 전문이 일본 교과서에 실렸다.

이바리기 노리코은 윤동주의
생애와 시를 해설하면서 이렇게
썼다. "사실 내가 윤동주의 시를 읽기 시작하게 된 계기는 그의 사진
을 보고 나서였다".  "이렇게 맑고 단아한 얼굴의 청년이 어떤 시를
썼을까 하는 흥미, 대학생 같아 보이는 지적인 분위기, 그야말로
티끌 한 점 없을 것 같은 젊고
순수한 모습, 내가 어릴 적 우러러봤던 대학생 상이였다". 고 말과 글로 썼다.
<100년이 넘은 기독교재단 교정에
윤동주와 정지용시비를 세웠다.>

당시에는 한글로 시를 쓰는 것 자체가 엄청난 저항이었다.
 "동주는 생전에 한 권의
시집도 남기지 못한 무명의 식민지 조선 청년일뿐이었다."-----노리코.
<도시샤대학-동주 시비.>

도시샤대학 유학생 윤동주가 1년 6개월을 갇혀 있다 숨을 거둔 곳은 후쿠오카 형무소다.
후쿠오카 공항철도를 타고 후지사키역에서 하차, 2번 출구로 나와 롯데리아 방향으로 100미터쯤 걸어가면 오른쪽 주택가 골목 끝에 표지석이 세워져있다. 
형무소는 주택가로 개발되면서 표지석만 남아있다. 그 옆에 미결수용 구치소가 새로 생겼다. 
옛 흔적을 찿다가 구치소 앞에서 '서시'를  낭독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럽 없기를 잎 새에 "
연희전문을 졸업한 윤동주는 부산항 제1부두에서 '창씨개명' 후 관부연락선에 오른다.

1부두
부산은 개항이 되면서 생긴 도시다.
하루에 외항선 140여 척이 드나
들고, 240여 척이 머무는 무역항이다 '해금정책' 속에서도 유일하게
열려 있던 공간이 부산항이다.
200년 동안 일본 남자들만 살던 초량왜관이 있었다.
용두산 주변 11만 평은 일본인
전용마을로 저팬타운이었다.

시대의 역사가 켜켜히 쌓여있는
왜관터와 부산항 제1부두는 
보존해야 할 문화유산이다.

절영도 사진
<부산항---1부두>

부산항 제1부두는 근대 도시
부산의 출발지이다.
1911년 준공 이후 항만과 철도 노선의 연결을 거쳐 일본의 대륙 침략의 시발지였다.
이 항구에서 이름도 없던 청년 윤동주가 창씨개명을 한 후 '릿쿄대'로 유학을 떠나고 영영 돌아 오지 못했다.
릿쿄대 교정에는 윤동주 시비가 세워져있다. 식민지 조선 청년의
시비를 릿쿄대와 도시샤대학에
세웠다. 놀라운 일이다.
이후 부산항 제1부두는 무역 및 여객부두로,  6.25전쟁때는 전쟁물자 및 피난민 수송기능으로 ㄹ월남전쟁때는 맹호 청룡부대가 살아있는
역사교과서다. 원형 보존 중이다.  

이순신의 '부산포해전' 승리가 있어
'부산시민의 날'이 제정됐지만,
축제도. 기념관도. 기념공원도 없는데,  부산항 1부두 앞 '이순신로'를 걸으니 생각이 깊다.

일평생 윤동주를  알린 두 동생을
기억해야한다.
윤동주. 윤일주.윤혜원이 살던 용정 옛 집터는 옛 모습이 사라지고 동북공정으로 옛 모습을 잃었다.

윤동주에게는 여섯 살 아래의 여동생 윤혜원. 열 살 아래의 남동생  윤일주 열여섯살 아래의 남동생 윤광주가 있다.
이 중 해방 후 대한민국으로 넘어와 윤동주의 이름과 작품을 알리는 데 공헌한 동생은 
윤일주(1927~1985), 윤혜원(~2011)이다.
<릿쿄대--윤동주 추모강좌 >

해방 후 1946년 6월 중국 지린성
용정을 떠나 서울로 온 윤일주는
윤동주의 연희전문 동문들을 찿아
다녔다. 형의 동기 강처중을 만나
형이 남긴 물품과 시 원고를 받았고 형의 후배 정병욱을 만나 그가 보관했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자필 원고를 받았다.

어렵게 모은 31편의 시를 정지용 시인에게 전달하고 서문을 부탁했다. 윤일주는 정지용을 만나 형의 개인적면모를 이야기했다. 이때 윤일주는 20세의 서울대 건축과 1학년 학생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48년 1월 정음사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시' 가 간행되었다.

<윤동주,송몽규가 체포된 '시모가모' 경찰서--가모가와 강변가에>

윤일주는 고향 집에 형이 남긴 자필 원고 묶음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집이 나오기 전인 1947년 4월
용정에 연락해 누이 윤혜원에게
형의 원고와 자료를 전부 갖고 서울로 오너라, 했다.
막 결혼한 상태였던 윤혜원은 해방
된 조국에서 새로운 생활을 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1947년 6월 용정을 떠난 윤혜원
부부는 두만강을 건너고 청진. 원산을 거쳐 38선을 넘어 정부 수립
후인 1948년 12월에 기적적으로
서울에 도착했다.
윤혜원이 가지고 온 윤동주 자필
원고가 포함된 개정판은 1955년에
나왔다. 이 시집에는 시 85편과
산문 4편이 수록되었다.
첫 시집에 비해 두 배가 넘는 작품이 실리게 된 것은 윤혜원의 공이다.
<릿쿄대시절--동주의 하숙집에 시를 써서 액자에 담아 전시했다.>

1983년 윤일주는 최종 개정판을 냈다. 그 시집을 우리는 읽고 있다.
망덕포구--시집원본(정병욱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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