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천문화마을--한국의 마추픽추
한국의 마추픽추--감천문화마을
가장 부산다운 곳을 안내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해운대는 아니었다. 산복도로 중 가장 깊숙한 산동네를 소개하기로 했다.
과거 부산에서 가장 낙후된 달동네
였던 곳이 '마을재생사업"을 통해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탈바꿈했다.
흉물로 방치된 빈집들은 예술가들의 작업실이나 전시 공간으로 꾸며져 마을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갤러리로 탄생시켰다.
감천문화마을이 '종교마을'에서
'예술가들의 마을'로 변모한 것이다.
놀랍게도 가옥이 들어선 토지의
대부분은 국유지이거나 부산시
소유지가 많다. 1955년 이주 당시 국유지 산비탈로, 정부의 묵인하에 점유해 마을을 형성했다. 땅은 국가 소유지이고 건물은 태극도 개인 소유였다. 그러니 무허가 가등기 건물 형태가 오랜 세월 유지되어 온 것이다.
지금처럼 계단식의 독특한 형태를
갖게 된 것은 조철재 상제(태극도
도주)의 계획 아래 이루어졌다.
'상제'란 우주를 관장하는 하나님,
옥황상제로 태극을 관장하는 분을
말한다. 그의 가르침은, 남을 배려하고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삶으로 요약된다. 그 철학이 벽돌
하나 하나에 녹아 들어 지금의
마을을 만든 것이다.
'마을의 모든 길은 서로 통하도록
설계'하여 막힘 없는 기운의 흐름을
중시했고, 구역을 나누고 번호를
부여해 체계적으로 관리하였다.
산비탈을 깎고, 집을 짓고, 길을 내는 고된 노동 자체가 태극도 신도들의 신앙 수행이었던 셈이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이 수행이라
고 가르첬다.
보수동 책방골목 산자락에서 수천 명의 신도가 집단으로 밀집해 살다가 아미동과 초장동 일대로 거주지를 옮겼다.
신앙촌을 건설하기 위해 오가던 고갯길이 까치고개다.
감천동으로 넘어오던 까치고개를 태극도 신도들에게는 고통을 통해 낙원으로 들어가는 관문에 비유했다.
과거에 신도들이 무거운 건축 자재나 물을 길어 오르내리던 148계단은, 업보를 씻고 도에 이르는 과정으로 '수도계단'이라 불렀다. 대문마다 번호를 매겨 구역별로 체계적으로 관리했다.
태극도는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사상 교리로 스스로를 경계하게 했다. '상생'과 '조화'의 철학은 감천2동이라는 공간에서 구현해낸 것이다.
도주 조철재는 태극도의 창시자로 감천마을에 잠들어 있다. 그의 호가 '정산'이라 '조정산 태극 도주'라 부른다.
그는 1925년 정읍에서 '무극도'라는 이름으로 종단을 세웠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하고, 해방 이후인 1948년 보수동에서 '태극도'라는 이름으로 종단을 일으켰다.
조철재는 몰려든 피란민 신도들을 한 곳에 모아 공동체를 만들었고 그것이 지금의 태극도 마을인
감천문화마을이 됐다.
당시에는 사람이 살지 않던 척박한 산비탈이었기에 외부의 방해를 받지 않고 신도들이 모여 수행하기에 적합한 곳이었고, 태극도라는 독특한 신앙 공동체를 탄생시키게 되었다.
근면함으로 계단식의 독특한 형태를 갖춘 감천문화마을을 찾았다.
지하철 1호선 토성역 6번 출구로
나와, 부산대학교병원 지역응급센터 옆 버스정류장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언덕을 오르면 '감천문화마을'이다.
그런데, 버스정류장에 제대로 된 안내 표지판이 없다. 감정초등학교와 함께 묶여 있어 감천문화마을을 알아보기가 힘들다. 연 300만 명이 감천문화마을을 찾고 대부분이 외국인이라는 걸 행정은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산토리니'로 불리며 외국인 관광객이 넘쳐나는데도 관할 구청의 행정수준이 이 정도라니.
토.일요일은 넘쳐나는 외국인 관광객들로 마을버스 타는 걸 포기해야할 정도다.
마을버스를 타면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을 지나 고개를 넘으면 '감천문화마을"이다.
아미동은 한국동란 때 형성된 마을들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공동묘지의 비석과 상석을 주춧돌 삼아 그 위에 천막을 치고, 루핑집을 짓고 살았다.
그래서 '비석문화마을'로 불린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동네다.
아미동이 '죽은 자의 공간' 위에
'산 자들이 둥지'를 튼 처절한 생존의 현장이라면, '감천문화마을'은 신앙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형성된 마을이다.
감천의 지형이 앞으로는 바다가 보이고 뒤로는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가파른 산비탈은 '태극도'의 원리 중 음양의 조화를 이루는 명당터로 수행하기에 적합한 마을이었다.
태극도 신도들은 이곳에 정착하며
단순히 집을 지은 것이 아니라 독특한 원칙을 세웠다.
'모든 집이 햇볕을 골고루 받고, 앞
전망을 가리지 않도록' 계단식으로
집을 배치했다. 상생의 교리를 건축으로 실천한 사례다. 피란민이었던 태극도 신도들에게 이곳은 단순히 밀려난 곳이 아닌 '고난 속에서도 신앙의 터로 약속의 땅이라는 의미가 컸다고 볼 수 있다.
'남을 배려하고 함께 공존한다' 는
태극도 교리를 주거형태에 반영한
결과였다. 이렇게 계단식 풍경이
만들어졌다.
한국의 마추픽추로 손색이 없다.
<이 동내에서 가수 정훈희와 복싱의 장정구가 아미초등학교를 졸업했다--60년대 비석마을 추억 듣기>
사하구의 동쪽 끝자락에 있는 감천동은 1동과 2동으로 나뉘어 지형적 특징과 형성과정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감천1동은 화력발전소가 있는 아랫마을로 평지에 가깝고 감천항 주변으로 아파트 단지와 상가, 공장들이 자연스럽게 형성된 공업지역이다.
반면, 감천2동은 특유의 산비탈 계단식의 독특한 주거구조를 갖춘 윗마을이다. 감천문화마을은 감천2동 태극도 본부와 도주 조철재 묘지를 중심으로 1,500여채 가옥이 밀집해 있다. 대부분 저층 단독주택
이며 5천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고, 문화구역은 1,500명 정도다.
2010년 3천 명이 넘었던 거주자가
절반 가까이 줄어드는 공동화현상이 진행 중이다. 관광자원화는 성공했지만 연간 수백만 명 관광객이 몰려들면서 사생활 침해로 원주민의 이주는 막지 못했다.
지금도 조철재 상제가 태어난 날(탄강일)과 돌아가신 날(화천일)은 본부에서 대규모 치성이 열린다. 마을 전체가 경건한 분위기에 휩싸인다. 참 묘한 동네다.
기행작가
권영주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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