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문익환.장준하
[문익환과 윤동주 그리고 장준하]
<북간도의 십자가>라는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북간도, 그러니까 두만강 건너 북간도로 향했던 함경도 사람들, 그 가운데 신앙으로 뭉쳐 독립의 의지를 불태우고 이후 한국의 민주화운동에까지 깊은 족적을 남긴 분들의 이야기들이다.
그 가운데 문익환과 윤동주가 등장한다....... 그 둘의 이야기를 곱씹는 것으로 영화의 감흥을 정리해 본다.
1917년생 윤동주는 해방 6개월 전, 후쿠오카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와 문학은 걸출한 광채로 한국 문학사를 휘감고 있다.
“괴로웠던 사나이 /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 모가지를 드리우고 /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 조용히 흘리겠습니다”<윤동주 작--십자가>라는 싯귀처럼
<릿쿄대-동주 예배>
시대의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는 삶을 살았던 친구가 있었다. 그가 같은 반
친구였던 문익환이다.
문익환은 북간도 용정 명동촌 고향 친구였다. 윤동주와는 어릴 적부터 죽마고우로 자랐다. 문익환은 윤동주의 문재(文才)를 부러워했고 윤동주는 문익환의 외모에 콤플렉스를 지녔다고 한다.
문익환이 후일 결혼하고자 그 부인을 만났을 때 부인의 집안에서는 폐병쟁이라 하여 반대가 있었으나 한 번 문익환을 만나 본 부인이 결사적으로 이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주장하여 관철시켰다는 일화가 있는데 물론 부인 박용길 장로(배우 문성근의 모친)의 사람 보는 눈의 높음을 인정해야겠으나 ‘영화배우 같았다’는 문익환의 외모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윤동주와 문익환 사이에서 있었던 작은 일화 하나도 웃음이 나오게 한다. 학창시절의 어느 날 윤동주는 문익환의 모자를 탐낸다. "야 익환아. 그 모자 나 주면 안되겠니?” 윤동주의 모자가 낡았을 수도 있고 문익환의 모자가 월등 질 좋은 것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윤동주 집안이 모자 하나 못 살만큼 빈한한 집안도 아니었는데 다짜고짜 문익환의 모자에 눈독을 들인 이유는 무엇일까.
모르긴 해도 그만큼 문익환이 쓴 모자가 멋있어 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싸구려 옷을 걸쳐도 심지어 죄수복을 걸쳐도 영화배우 강동원이 입으면 빛나는 패션이 되듯이 문익환의 모자는 문익환의 수려한 외모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청춘들이 많이 행하는 것처럼 윤동주도 그 모자를 쓰면 자신도 문익환처럼 보이리라 착각했던 것이 아닐까.
실제로 윤동주는 후일 연희전문 학생 시절 고향에 돌아오면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던 대학생 모자를 일부러 쓰지 않았을 만큼 소탈한 사람이었다. 미남 문익환은 능청스레 답한다. “호떡 사주면 바꿔 주지.” 문익환은 배가 터지도록 호떡을 얻어먹은 후 모자를 건넨다.
얼굴도 잘생긴데다 공부도 잘해서 윤동주의 기를 죽이기도 했던 문익환이지만 역시 윤동주의 글쓰는 능력만큼은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었다. 문익환은 자신보다 늦게, 저학년으로 편입해 왔지만 (공부는 문익환이 위였다는 또 하나의 증거) 선배의 인정을 받고 문예지 편집을 맡게 된 윤동주로부터 시 한 편을 써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나름 긴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문익환도 시를 쓰고 싶어하는 사람이었고, 그를 통해 인정받고 싶은 욕망도 큰 사람이었다. 정성껏 한 줄 한 줄 다듬고 깎아서 쓴 시를 윤동주에게 내밀었을 때 윤동주는 딱 한 마디로 문익환을 무참하게 만든다. “이게 어디 시야?” 이 말 한 마디는 문익환의 삶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문익환 본인의 고백이다.
<동주 시비 옆에는 정지용 시비가 세워졌다. 100년이 넘는 기독교
대학교에 조선 식민지 청년의 시비를 세웠다.>
“그 이후로 시는 나와 관계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었다. 동주가 살아 있어서 내가 하는 성서번역을 도와주었다면(살아 있다면 기꺼이 도와주었을 것이다) 나는 영영 시를 써보지 못하고 말았을 것이다.(문익환, 「하늘 바람 별의 詩人 尹東柱」, 월간중앙,1976. 4)
문익환은 윤동주 송몽규가 보지 못한 해방을 보고, 그 이후 수십 년을 살아내린 인생 역정은 드라마 그 자체라 할만하다.
한국에서 손 꼽히는 구약학자였던 문익환은 오랜 세월 강단의 신학자이자 성서 번역가로 살았다.
그는 시편과 아가 등 구약성서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시들을 번역하여 소개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이었다. 그를 번역하면서 다시 문익환 목사는 윤동주의 핀잔으로 꺾여 버린 시심을 다시 끄집어내기 시작하게 된다. 그런데
절친한 친구였던 동갑내기 장준하의 죽음을 맞아 그의 인생은 헝클어진다. 출판인이자 정치인이며 재야 민주화운동가였던 장준하는 유신 정권의 눈에 돋은 가시 정도가 아니라 그 가슴에 꽂힌 대못 같은 존재였다.
그랬던 그가 1976년 8월 당최 가지도 않는 산에 등산을 갔다가 석연찮은 죽음을 맞았을 때 문익환은 기나긴 잠에서 깨어난다. 얌전한 목사, 책상머리의 구약성서 번역자에서 벗어나 한국 사회를 향해 분노를 내지르고 새로운 세상의 빛을 뿌리는 예언자로 나선 것이다.
늦바람이 무섭다는 말도 있으나 늦봄 문익환의 열정은 대단했다. 늘 길위에 있었다.
1976년 현실에 참여한 이후 그가 죽은 1994년까지의 18년 동안 그는 11년이 넘도록 감옥에 있었다.
1986년 5월 윤동주보다도 젊었던 학생들이 군부독재에 연일 분신으로 항거하던 무렵, 서울대학교 강연에 나서던 문익환을 어머니 김신묵 권사가 붙잡았다.
“익환아. 꼭 이거 한 마디는 해 주거라. 일제 때 독립운동하던 사람들이 단 한 사람도 그렇게 죽는 거 봤니. 네가 가서 꼭 부탁하거라. 제발 죽지 말고 싸우라고.” 어머니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서울대학교에 들어가 강연을 시작하려던 찰나 또 한 명의 서울대학생이 온몸에 불을 붙인 채 전두환 정권 타도를 부르짖으며 죽어갔다. 이 참극을 눈 앞에서 지켜본 문익환 목사는 스스로 체포되어 감옥으로 간다.
1987년 7월 8일. 공교롭게도 그 다음 날은 1987년 6월 9일 연세대 교문앞 시위에서 최루탄을 맞고 사경을 헤매다 숨을 거둔 연세대생 이한열의 장례식 날이었다.
옥중 생활의 피로도 씻기 전에 문익환은 상복을 입고 장례식 단상에 오른다. 그곳에서 그는 연설이 아닌 절규를 한다. 그러나 그 절규는 대한민국 현대사에 길이 남을 명연설이었다. 문익환은 1970~1980년대 한국을 지배한 군부독재, 그리고 비인간적인 사회 체제에 맞서 싸우다가 죽어간 사람들의 이름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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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부터 이한열까지 무려 26명
의 이름을 부른다. 이런 연설을 TV
화면으로 봤던 기억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울컥할때가 많다.
빛이라곤 보이지 않던 어둠속에서
간절함만 있다면, 꽃이 될 가능성은 있다고 믿었던 청년 전태일,
나는 이 시대의 예수라고 부른다.
광주의 희생처럼 우리 역사의 디딤돌이 된 이름들이었다. 문익환 목사의 절규에 실린 이름들을 들으면서, 역사의 깊은 잠을 일깨우기 위해 스스로 종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렸던 이들의 노래를 부르면서 사람들은 꺽꺽거리고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아마 그 순간 문익환은 윤동주를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즈음 그가 남긴 시다.
"너는 스물 아홉에 영원이 되고
나는 어느새 일흔 고개에 올라섰구나
너는 분명 나보다 여섯 달 먼저 났지만 나한테 아직도 새파란 젊은이다
예수보다 더 젊은 영원으로
동주야, 난 결코 널 형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니. "
故 이한열의 서울 시청 앞 노제에는 한국 역사상 최대라 할 인파가 집결했다. 그 육중한 인파와 그들이 내는 소음 가운데 서울 시청 깃대에는 때 아닌 파랑새 한 마리가 사뿐히 내려앉아 꽤 오랫 동안 사람들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이한열의 넋이 파랑새로 왔다며 수군대기도 할 만큼 진기한 모습이었다.
문익환이 그 파랑새를 보았다면
윤동주를 생각했을것이다.
윤동주의 출생은 한 가족만의 경사가 아니다. 한 민족의 경사이고 역사의 경사다. 부끄러운 망국의 역사에서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이 살다'간 그 삶의 역사를 가슴에 새긴다.
이 영화는 윗글에 등장 하는 사람들이 생생히 나온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모여, 역사가 된다.
■ 윤동주연구. 국내 박사1호는
연세대 마광수교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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