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양고궁--봉림대군.소현세자
■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 생활을 하고, 조선인 노예시장이 있던 심양행 기차를 탔다.
'심양고궁'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자금성.경복궁에도 없는 유목민의 게르식 궁전이 있는 유일한 고궁이다.
팔기군을 상징하는 팔각형 '대정전'이다. 좌.우에 팔기군 수장들의 집무실이 있다.
누루하치는 팔기군 수장들과 의논 후 통치를 했다. 후금의 정전이 팔각형이다. 이동식 게르 모양이다.
아들 홍타이지가 후금을 청나라로 개칭하고 심양은 수도가 됐다.
이 도시를 청나라 말기에 '봉천'이라 했다. 하늘의 명을 받든다는 뜻이다. 선양은 중국식 발음이고, 한국식 발음은 심양이다. 볕:양(陽) 자를 쓴다.
산의 남쪽, 강의 북쪽에는 '양'자를
썼다. 낙양, 서울의 한양도 한강의 북쪽이라 볕 '양' 자를 쓴 것과 같다.
1625년 후금 누루하치가 건설하기 시작해 아들 홍타이지에 의해 완성된 고궁이다. 만주식 게르형식의 전통 건축 전각에서 인조의 사신을 맞았고, 결과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참혹한 역사만 남겼다.
말을 달렸다---병자호란.>
심양 인구가 90만 명으로, 서울 인구와 비슷하지만 면적은 서울의 21배에 달한다. 만주벌판을 상상케 한다.
관동군이 만주사변을 일으킨 곳이 심양 근처다.
1931년 3월 1일, 관동군의 괴뢰국인 만주국을 건국했으니 만주국의 핵심 도시도 심양이다.
1636년 12월 추운 겨울, 꽁꽁 언 압록강에 가마니를 깔고 용골대 선발부대가 4일 만에 한양을 접수했다.
놀라운 기동력이다. 임진년 왜란 때도 부산에서 한양까지 20일이 걸렸던 역사와 겹쳐 쓰리다.
팔기군 주력부대인 철기병이 한양에 도착하면서 병자년 호란은 시작됐다.
미처 피난갈 시간도 없이 남한산성에 숨어 있던 인조가 47일 만에 잠실나루를 건너 와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의식을 치르며 전쟁은 종료됐지만, 패전국 조선 백성을 전리품으로 끌고 갔다.
끌려온 조선 백성이 50여만 명이 넘었다. 대신과 자제들, 특히 여성이 15만 명이 넘었다. 서울 홍제천에서 목욕을 시켜 돌아 왔지만 대신의 딸까지도 '환향년'이란 흉칙한 신조어를 만들어 냈다.
<의주로 가는 교역의 길목이다.
중국과 북한의 경계지점.>
붙잡혀 온 조선인 남자들은 팔기군으로, 여성들은 처첩으로 팔려 나갔다.
당시 노예시장이 형성되었던 장소는 남탑공원으로 조성되어 심양 시민들의 대표 휴식 공간이 돼 있다. 연암 박지원이 '연행록'을 남겼는데 <열하일기>에 이렇게 기록돼 있다.
"심양에 입성하기 전에 남탑 일대를 지나 가노라면 반드시 당시의 치욕적인 일들을 상기하곤 했다."
조선 500년 내내 <열하일기>는 금서였다. 정조는 글 속에 자신의 생각을 넣었다고, 노론의 핵심 가문인 연암을 죽이지는 못하고 몇 번이나 반성문을 쓰도록 했다.
왕자 봉림대군(효종), 왕세자 소현세자, 세자빈 강씨가 8년 간(1637~1644) 볼모로 잡혀 와 살았던 고려관(조선관)이 있던 자리는 유치원과 아파트가 들어서 있어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소현세자가 귀국 후 조선관도 사신들의 숙소로 이용됐다.
조선관 터와 노예시장이 있었던 자리에 아픈 역사의 상징물이라도 세워지기를 바라는 간절함을 가슴에 담고 왔다. 심양의 찬 바람이 여행객의 마음을 얼어붙게 했다.
역사는 책에도 있지만 길 위에도 널려 있다. 심양 서탑에는 코리아 타운이 있다. 만주 군벌의 수장 장학림이 건립한 '봉천방직공장'은
직원이 천 팔백 명이 넘었다.
조선 여성을 우선적으로 채용하자
남성들이 모여 들면서 조선족 가구 수가 천 여 가구가 넘었다.
6천여 명의 조선인들이 머물면서 1923년부터 한인타운이 형성됐다.
1992년 노태우 때 국교정상화가 되면서 1994년에는 백제원 호텔이 들어서고 한국식 사우나, 식당, 노래방, 냉면집, 떡집으로 한인타운이 확대됐다. 심양도 돈이면 뭐든 가능한 자본주의가 돼 있었다.
장개석 총통의 부인 송미령과 만주 군벌 수장 장학림의 사랑, '시안사건'을 생각하며 걸었다. 장학림은 세계 최장수 가택연금으로 생을 마감했다.
아, 송미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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