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청령포이야기.
조선 단종의 유배 이야기를 담은
영화가 천만 관객을 넘어 고공행진을 하고있다.
오백년 만에 전국민이 단종의 재를
올린 기분이라고 야단법석이다.
세종이 그렇게 애지중지 했다는
손자 단종 이야기다.
유배지 청령포가 있는 영월은 단종과 김삿갓의 역사, 문학이 서린 곳이다.
'청령포'는 동강과 서강이 흐른다.
어떻게 인간이 이런 자연을 찾아내어 유배지로 생각했는지 놀랍다.
빠른 물살에 속절없이 떠내려가는
이가 있다.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고작 열여섯 나이로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은 단종이다.
흰 옷소매 아래로 손이 나와 있으나
얼굴은 물속으로 가라앉아 보이지
않는다. 종잇장처럼 가볍게 흩어지는 여린 왕의 시신을 붙잡으려 거침없이 헤엄치는 남자가 있다.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 삼족을
멸한다"는 세조의 엄명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강물에 뛰어든 영월의 호장 엄흥도다.
영화는 역사속 비극의 서막을 풍경화처럼 보여 준다. 죽어서 태백산으로 올라가 산신령이
되었다는 단종의 혼령을 영월 사람들은 믿고 있다. 단종은 죽어서
신이 되었다.
이런 이야기가 문학이다.
우리가 왜 사극을 좋아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조선의 왕 27명 모두 드라마나 영화화 되지 않은 인물이 없다.
그 중에서도 광해군, 연산군, 사도세자, 계유정란 등 극적인 왕실 스캔들에 집중돼 있다.
6대 왕 단종은 사극의 단골로
등장했지만 주인공이었던 적은
드물다. '계유정란'을 다룬 드라마와
영화는 많았지만 그 속에서 단종은
보조적 역할에 머물러 왔다.
사람들은 아는 이야기를 살짝
비틀거나 숨겨진 이야기를 꺼내는
걸 좋아한다. 단종 폐위까지는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유배 이후는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노산군이 해를 입었을때 고을 아전
엄흥도가 찾아가 곡을 하고 장사했다."는 <조선왕조실록> 한 문장에서 상상력은 시작됐다.
실제 영화에서는 세조가 된 수양대군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유배지 영월에서
폐위된 왕의 밥을 해주고 잠자리를
살피는 엄흥도로 대표되는 '광천골'
사람들의 모습이 비중있게 그려지고
있다. 단종 역의 박지훈은 단종 열풍의 화룡점정이다. 영화 속 박지훈 눈빛 연기에 홀린 사람들이 청령포를 찾는다.
관광이 지역 경제를 살리고 있다.
나는 밤낮없이 울었을 단종의
아내가 내내 어른거렸다. 단종의 부인 정순왕후 송씨는 정읍 출신으로 15살에 왕비로 책봉됐다.
그녀가 왕비였던 시기는 고작 1년 6개월이었다.
그러다 단종 복위 운동에, 아버지
송현수와 누나 경혜공주 부부가
연류되면서 그녀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결국 남편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돼 영월로 유배되고 16살에 죽임을 당했다.
3년 6개월을 함께하다 홀로된 그녀는 죽을 때까지 노산군 부인
신분이었다. '정업원'에서 관노비의 신분으로 평생 살았다.
'정업원'은 왕실 여인들이 출가하여
살도록 한 사찰이다.
한양 한복판에 가두어 두고 누구와도
만나지 못하게 했다.
관노비로 평생 절개를 지키며 살아야 했다. 영녕전, 사능, 정업원은 내 필수 답사지다.
영화는 단종의 청령포를 보여주지만
조선은 노비의 나라였다.
한 사회에 노비가 40%를 넘으면 노비사회라 한다. 그러니 조선은 명백한 노비사회였다.
3~4% 양반이 백성을 지배했다.
같은 민족을 그렇게 많이 노비로 삼았다는 것은 세계사에서도
유래를 찾기 힘들다.
정적의 아내나 딸을 노비로 삼았다.
정인지는 정적 김종서 아들의 아내와 딸을 노비로 거느렸다.
퇴계 이황은 367명 노비를
거느렸고, 자손들에게 상속했다.
개국공신은 1000명 노비를 거느렸고, 세종의 아들 영흥대군, 광평대군은 1만 명 안팎의 노비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국가가 법적으로 노비제도를 운영했다. 조선이 지도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랬다. 그런데, 그 많던 노비나 상놈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그 비밀의 열쇠는 ‘일제강점기’와 '한국동란"에 있었다. 육이오 광풍에 양반, 상놈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집안이 가난하거나 천해도 공부만 열심히 하면 판사나 검사가 됐다.
출세하는 데 신분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천년 동안 이어져 오던 노비가 전쟁의 광풍에 한순간 사라졌다.
단종의 부인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단종과 엄흥도, 한명회를 보고 청령포를 찾는다. 하지만 조선 5백 년 노비제도를 국가가 운영했다는 걸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의 선조들은 대부분 노비로 살다 갔다. 단종의 부인도 노비였다.
단종이 죽자 관노비로 전락한 부인은 83세까지 살았다.
단종보다 64년을, 세조보다 53년을, 한명회보다 34년을 더 살며 83세에 세상을떠났다.
평생 단종을 생각하며 그리워했다는 의미로 남양주에 있는 그녀의 묘에 '사능'이라는 능호를 올렸다.
단종과 정순왕후의 신위는 종묘
'영녕전'에 모셔져 있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 간 시기를 다룬
영화는 단종의 마지막 4개월을 다루고 있어 그녀가 영화엔 등장
하지 않지만 내내 어른거린다.
사육신도 겹쳤다.
사육신의 심문 과정은 참혹했다.
성삼문은 세조의 찬탈에 맞서
단종복위를 꾀하다 국문장에서
시뻘건 인두가 살을 지져도 그의
입에선 진실만이 흘러 나왔다.
육신은 부서졌지만 그의 기개는
꺾지 못했다. 부당한 권력이 심판
할 수 없었던 성삼문의 의리를 보고
후대 왕들은 충신으로 모셨다.
이유가 있다.
충신, 열녀를 교육하려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국정교과서는 <삼강행실도>
였다.
우리가 자랑스러워 하는 500년
조선의 화려한 궁궐 뒤에는 '말하는 도구'로 살아야 했던 수많은 노비들의 눈물이 숨어 있다.
비극의 정점에 서 있던 단종과, 노비가 된 부인를 통해 이 시대
지속가능한 가치를 생각해 본다.
기행작가 권영주.
댓글
댓글 쓰기